HER OWN SENSE
고요하고 묵직한 추상미의 시선을 따라.
🕶️ <트레이서> 이후 거의 3년 만에 참여한 드라마 <지금 거신 전화는>이 방영을 앞두고 있어요.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번 드라마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지금 거신 전화는>은 냉담한 쇼윈도 부부였던 두 남녀 주인공이 서로 사랑하는 속마음을 확인하고 부부 관계를 회복해가는 과정을 그린 멜로 드라마예요. 그 안에 스릴러 요소가 들어가 있고요.
🕶️ <지금 거신 전화는>에서 대학교수이자 주인공 ‘백사언’의 엄마인 ‘심규진’ 역을 맡았어요. 다 가진 듯 보이지만 어딘가 어둡고 불행한 기운이 비치는 인물이죠?
남편은 대선 후보고 본인도 여성 최초의 범죄심리학자이자 교수라는 직업을 갖고 있어요. 자존심도 강하고 자만심도 차 있는, 뭐 하나 빠질 게 없어 보이지만 어두운 과거를 지닌 여자고요. 늘 차분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이면에 굉장히 깊은 슬픔과 서늘한 기운도 서려 있어요. 그런 이중성이 더 매력 있더라고요. 캐릭터를 표현할 때도 그 부분을 특히 신경 썼어요.
🕶️ 얼마 전 화기애애한 대본 리딩 현장이 공개되기도 했어요. 드라마 촬영은 6월부터 진행된 걸로 아는데,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의 합은 어떠한가요?
분위기나 환경이 전과 크게 달라졌지만 촬영 현장은 겪어본 중 최고예요. 화기애애하고 연극배우 출신이 많아서 다들 너무 친해요. 그런 인연이 있어서 만나면 늘 연극판 얘기를 해요. 남편 ‘백의용’ 역의 유성주 배우에게도 극 중에선 차가운 관계지만 “사랑 좀 해줘, 치사한 남편아” 하며 장난치고요.
🕶️ 영화감독, 연극 제작자로도 활동 중이에요. 영화제 집행위원을 맡거나 영화 유튜브 채널 ‘시네마브런치’를 운영한 적도 있고요. 최근 캐릭터나 연출이 눈에 띈 작품이 있나요?
저희 드라마 바로 전에 방영한, 한석규 선배가 프로파일러로 나오는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미장센이 정말 좋았어요. 보통의 스릴러는 박진감 넘치고 스피디한데, 이 작품은 굉장히 느려요. 느린 스릴러지만 되게 정교하게 잘 만들었고 사람을 사로잡고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일본 영화도 기억나네요. 생명을 쉽게 훼손하고 환경이 오염되면서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잖아요. 자연과 생태계가 풍요로운 일본의 한 시골 마을이 개발을 위해 사슴의 길을 막아버리면서 황폐화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영화예요.
🕶️ 새로운 것을 창작하려면 그만큼 인풋이 중요할 것 같아요. 가장 영감을 많이 얻는 곳은 어디인가요?
책과 영화, 여행이에요. 예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문학소녀였고 전공도 문학이라 이제 책은 그냥 습관화된 것 같아요. 일이나 육아를 하다 보면 하루에 몇 장 읽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으면 불안해요. 늘 무언가를 읽어야 하고 좋은 책 있다고 하면 무조건 일단 사두죠. 지금 대본을 쓰는 드라마에 식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레퍼런스 삼아 로빈 월 키머러의 «이끼와 함께»를 읽었는데, 마침 한강 작가가 아버지에게 이 책을 추천했더라고요. 숲의 바위든 도심 속 건물이든 어디에나 이끼가 피어 있잖아요. 꽃을 피우지도 않고 보잘것없이 작은 이끼가 생태계를 살린다고 해요. 자연과학서면서도 저자의 인생 얘기를 곁들여 에세이처럼 풀어낸 장르 파괴적인 책이라는 점도 재미있어요.
🕶️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 연극 <스크루테이프> 등 연출한 작품을 보면 아픔과 상처, 상실 등 세상과 인간의 뒤편에 관심이 많은 듯 보여요.
생명이 눈을 뜨고 자라나서 성장하는 과정이 하나의 메타포예요. 기술의 발전이 생산성을 높이고 일상을 편리하게 해주기도 하겠지만, 이 부분에만 집중하고 개발하면서 문명을 발달시키는 건 ‘진짜 생명’에 역행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누군가는 이 자리를 고수하고 이게 중요한 가치라는 걸 계속 얘기해야 해요. 예술은 이런 것들을 적나라하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메타포로 전하죠. 그래서 사춘기를 보내고 성장해가는 전쟁 고아들을 품고 길러내는 선생님의 마음, 자립 준비 청년들이 플랜테리어 기업을 차리면서 식물의 성장과 더불어 자신들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 등을 작품으로 그리는 거고요.
🕶️ 연극 <스크루테이프>는 배우인 남편과 함께 제작했죠. 같은 일을 하는 만큼 공감대도 넓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도 잦을 듯해요.
작품 하나를 보더라도 전문적인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제작자 입장에서는 이 작품에 어떤 메시지를 담을 것이냐, 어떤 주제 의식을 갖고 만들 것이냐 같은 대화를 해요. 그러다 보니 사람 사는 얘기, 세상에 대한 광범위한 얘기까지 하게 돼요. 비즈니스적으로 치사한 돈 얘기도 하죠. <스크루테이프>에선 작가이자 각색자, 연출가로 서로의 역할이 다르니 의견이 충돌할 때 각자의 자리에서 더욱 열정적으로 싸우기도 했어요.
🕶️ 그렇다면 남편과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하는 과정은 어떠한가요?
급하게 뭔가를 또 같이 하거나 말을 붙이기보다 서로 시간과 여유를 두면 훨씬 자연스럽게 해결되더라고요. 신혼 때는 싸우고 하루 이틀 말 안 하면 큰일 나나 보다 싶어 누구든 먼저 어설픈 화해를 시도하잖아요.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이제는 알아요. 그만큼 안정되었다는 뜻이겠죠. 사실 상대방을 안쓰럽게 여기는 게 최고의 사랑인 것 같아요. 아마 결혼 생활 10년 이상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거예요.(웃음)
🕶️ 배우이자 연출가인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은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들 지명이 역시 끼가 많고 상상력이 풍부한 데다 창의적인 면모를 지녔다고요?
유튜브 구독자가 벌써 2000명이 넘어요. 학교 축제 때 혼자 나가 마술 쇼도 하고, 지금은 배우가 꿈이래요. 지명이가 어떤 직업을 가질지는 모르겠지만 춤이든 말이든 표정을 통해서든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가 정말 강해요. 요즘은 게임을 열심히 해요. 게임 속 자신의 월드에서 자기표현을 하는 거죠. 하나에 빠지면 미친 듯이 파고드는 성격이라 제풀에 지칠 때가 오겠지 하면서 그저 지켜보고 있어요. 성적표를 받아오면 욱할 때도 있지만요.(웃음)
🕶️ 반대로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는 게 필연적이라고 느끼기도 했나요?
필연적이라고 느끼기도 했지만 주변에서 아버지의 끼를 이어받았으니 같은 길을 가라고 많이들 제안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스스로 이 직업을 얻기 위해 정면 돌파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특히 배우로서 절실하지는 않았던 거죠. 아버지의 이름에 대한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담과 더불어 스스로를 정체성을 찾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 벌써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할 시간이에요. 올 초 계획했던 일은 모두 이뤘나요? 새해의 목표가 있다면요?
올해는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바쁘게 지냈어요. 내년에는 일단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 대본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려고 해요. 그런데 이번에 배우로 복귀해보니 현장도 좋고 연기하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새들이 바람을 타고 활공하는 것처럼 내 삶이 희망적이고 창의적인 것들로 채워져 유유히 우아하게 날아갈 수 있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어요.
Fashion Editor 박유은
Feature Editor 전혜라
Photographer 주용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