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고요하게 유선


크로스 홀터넥 톱, 팬츠 모두 LEHHO /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지난 3월 막을 내린 연극 <비기닝>이 호평을 받으며 강릉 공연이 추가됐죠.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는 거 같아요. 

규모가 작은 작품은 서울 공연의 흥행에 따라 지방 공연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아요. <비기닝>의 경우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 기간이 너무 짧기도 했고, 다른 작품에 비해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은 작품이다 보니 공연을 끝낸 뒤에도 뭔가 ‘완벽히 소진했다’는 느낌이 안 들어서 아쉬웠거든요. 이제 정말 완벽한 ‘로라’(극 중 이름)가 된 것 같은데 무대가 끝났다니!(웃음) 그러던 중에 강릉 공연이 잡힌 터라 정말 신나게 열정적으로 연기했던 것 같아요. 다음 공연은 또 언제 하게 될지 기대가 될 정도로요.


백리스 드레스 SON JUNG WAN / 실버 링 & OTHER STORIES /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아직 그 안에서 빠져 나오기 싫은 거군요. 이번 공연은 뭐가 그렇게 특별했나요? 

그동안 꾸준히 연극을 하긴 했지만 국내 초연 작품은 <비기닝>이 처음이에요. <비기닝>은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성황리에 공연된 작품을 각색해 처음 국내 무대에 올린 연극이죠. 영국의 극작가 데이비드 엘드리지(David Eldridge)의 대표작인 <비기닝>은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한 3부작 중 1부예요. 영국에서는 2부인 <미들>까지 공연됐고, 마지막 <엔드>는 아직 공개가 안 됐어요. <비기닝>은 국내에서는 저희가 처음 선보이는 작품이라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각색 과정부터 배우가 깊숙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는 않거든요. 그런데 이번 작품은 저를 포함해 이종혁, 김윤지, 윤현민 배우 모두가 참여해 텍스트를 완성했죠. 설정, 대사, 분위기 등 원작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 관객의 정서에 맞게 매만지는 작업을 거의 한 달 내내 같이 했어요. 집에 가서 잠만 자고 다시 아침에 모여서 밤까지 작품 얘기만 했으니까요. 참여한 배우들 모두 작품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 밖에요.


작품 자체는 물론 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도 호평을 받았어요. 

정말 너무너무 감사하고 한편으로는 다행이에요.(웃음) 이번 작품은 국내 초연이기 때문에 관객 반응이 예측이 안 됐어요. 재연 작품은 관객들이 어느 부분에서 공감하고, 반응하는지 대략 알 수 있어서 연출이나 극의 포인트를 잡기가 비교적 쉽거든요. 그런데 <비기닝>은 해설집이 없는 숙제 같았달까. 그래서 관객들의 칭찬이 어느 때보다 기분 좋고 더 감격스러웠죠. 이번 강릉 공연 때 운 좋게 배우들 일정이 모두 맞아서 골고루 무대에 올라가고 뒤풀이도 신나게 했어요. 조별 과제 잘해서 A+ 받은 대학생들처럼 들떴던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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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들이 어떤 부분에서 깊게 공감하고 좋아했을까요? 

<비기닝>은 굉장히 현실적이에요. 단순히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직면하는 외로움과 고독의 순간들에 대해 두 사람이 나누는 진솔한 대화를 리얼 타임으로 보여주거든요. 주인공 대니와 로라가 어느 날 밤 우연히 나누는 1시간 30분 남짓의 대화를 관객들은 마치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듣고 보는 거죠. 두 사람은 각자가 처한 상황과 성격에 따라 외로움, 관계,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다양한 얘기를 나눠요. 일반적인   성 역할을 전복시키는 설정도 하나의 재미 요소로 작용한 것 같고요.   


그중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나요? 

극 중 대니의 대사예요. “난 SNS가 참 싫기도 해요. 사람을 너무 갉아먹는 것 같아서. 다들 행복한 사진들만 잔뜩 올리지만, 사실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행복한 척하는 거라는 걸 다 아는데 거기에 비해 내 인생은 좀 뭐랄까 너무 초라해 보여서”라고 말하거든요. 그럼 로라가 자기의 욕망을 막 얘기하다가 “결국 나에게 진짜 필요한 건 번드르르한 남자가 아니라 같이 웃고 얘기하고 가벼운 농담도 나누면서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죠. 딱 요즘 사람들이 공감할 만한 얘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삶의 가치는 화려한 이벤트가 아니라 나와 같이 울고 웃어줄 수 있는 진솔한 사람이 내 곁에 있나 없나로 판가름 나기도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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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그런 사람은 누구인가요? 

남편이요.(웃음) 남편은 제 모든 고민이나 생각, 갈등을 솔직하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친구예요. 딱히 주제를 가릴 필요도 없고,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골라서 써야 할 필요도 없고요. 혹시 제 의도와 달리 와전되거나 곡해될 위험도 없죠. 내 머릿속 상념들을 모조리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다만 성향 차이는 어쩔 수 없더라고요. 저는 공감을 원할 뿐인데, 남편은 자꾸 객관적으로 판단하거나 조언을 해서 가끔 서운하기도 한 걸 보면요.(웃음) 


아무래도 그 패턴은 부부 사이의 국룰인가 싶네요.(웃음) 요즘 딸 차윤이와의 주된 대홧거리는 뭔가요? 

아, 차윤이는 요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텐션이 조금 낮아졌어요.(웃음) 늘 유쾌하고 웃음이 넘치는 아이였는데, 지금은 나름의 고민도 생긴 것 같고요. 확실히 자기만의 세상이 더 커졌다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라고 해서 그 세상을 마음대로 휘젓거나 침범할 수도 없잖아요. 벌써 이렇게 컸나 싶어서 아쉽고 섭섭한 마음도 있지만, 그게 아이의 성장 과정이라면 받아들여야죠. 지금은 제가 엄마로서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할지, 그런 적응 단계에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아이의 진솔한 얘기를 더 많이 듣고 싶으면 어떻게 대화를 해야 할지 같은 것들을 고민해요. 아이에 대한 헌신적인 마음이나 사랑은 한결같지만 그걸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방식은 조금씩 달라져야 하는 것 같아요. 

 

 

오버사이즈드 슈트 셋업 MMAM / 톱과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요즘 가장 자주 떠올리는 단어,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흠… 조금 어려운 질문이네요.(웃음) 가장 자주 생각하는 말은 ‘편안함’인 것 같아요. 요즘은 내게 편안함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습관적으로 살펴보게 돼요. 가정에서도 그렇고 밖에서도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관계에서의 편안함을 많이 고민해요. 누군가에게 내가 편안한 사람이면 좋겠다, 이런 거요. 제가 오랫동안 끈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관계를 보면 다들 평온하고 온화하게 늘 한결같은 사람이더라고요. 괜스레 마음이 헛헛하거나 힘들 때 그런 안정감이 저를 꽉 채워주는 느낌이죠.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든든한 사람이 되고 싶고요. 또 말의 무게감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말수도 줄이고, 목소리도 낮추고, 나를 좀 평온한 가운데 두고 싶어요. 


 

내추럴한 커팅과 레이어드된 시폰이 돋보이는 베스트 MMAM  /슈즈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평정심을 찾는 건 생각보다 연습이 많이 필요한 일이더라고요. 

맞아요. 요즘 저는 러닝을 하면서 그 루틴을 찾았어요. 연극을 하다가 문득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는 자각이 들어서 러닝을 시작했는데, 인생 운동을 찾은 기분이에요.(웃음) 완벽한 유산소 운동인 데다 특별한 준비도 필요 없고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고, 누군가와 약속을 하지 않아도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죠. 러닝을 하다 보면 잡념도 사라지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도 해요. 의욕도 막 샘솟고요. 내 몸이 탄탄해지는 만큼 마음도 단단해지나 봐요. 꼭 달려보세요, 정말 적극 추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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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shion Editor 박유은

Feature Editor 김은향

Photographer 김선혜

Styling 박상윤

Hair 김하나(에이바이봄)

Make-up 임유정(에이바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