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서 더 선명해진 것들

해외에 사는 손주와 한국의 조부모가 만나 함께 보내는 시간, 그리고 다시 헤어지는 순간까지. 이 짧고도 밀도 높은 시간을 기록하는 EBS <왔다! 내 손주>는 ‘가족’이라는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기억되는지를 보여준다.


EBS <왔다! 내 손주> 이창용, 이지연, 이승석

우리는 가족과의 시간을 당연한 듯 반복한다. 늘 곁에 있다는 익숙함 속에 함께하는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가족’이라는 의미 역시 점점 희미해진다. EBS <왔다! 내 손주>는 이 익숙함을 뒤집는다. 해외에 사는 손주와 한국의 조부모가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물리적 거리와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는 감정의 밀도를 포착한다. 짧은 만남과 긴 이별 사이에서 드러나는 가족의 모습은 그동안 잊고 지낸 가족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이지연 CP, 이창용 CP, 이승석 제작팀장은 <왔다! 내 손주>를 통해 가족을 기록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록이 어떻게 우리의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왔다! 내 손주>는 어떤 계기로 시작된 프로그램인가요?

코로나19가 막 끝난 시점에 기획 PD가 유튜브에서 관련 사연들을 많이 접했어요. 특히 해외에 사는 딸이 출산을 해도 코로나19 때문에 항공편이 막혀 부모님이 도와주러 가지 못하는 애틋한 상황이 당시 꽤 화제였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사연들을 정규 시리즈로 만들어 가족의 정의와 본질을 느껴보게 하자는 취지에서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EBS는 원래 유아와 다큐멘터리라는 양대 축 외에도 온 가족이 편안하게 볼 수 있는 가족 대상 프로그램을 확장하려는 고민을 늘 해왔거든요. 마침 <왔다! 내 손주>가 선하고 바람직한 내용으로 기획되어서 EBS의 가치와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다양한 가족 이야기 중에서도 ‘해외에 사는 손주와 한국의 조부모’라는 설정에 주목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요즘 가족의 전통적 정의가 해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할머니가 아주 먼 거리의 해외에 사는 손주를 만난다는 극한 설정을 택했어요. 비록 거리는 떨어져 있고 문화적 소통이 어려운 면이 있지만, 혈연적인 끌림이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는 모습에서 진정한 가족애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매달 많은 사연이 접수된다고 들었습니다. 출연 가족을 선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기준은 무엇인가요?

가장 먼저 고려하는 건 국가의 다양성이에요. 유럽, 동남아, 아메리카 등 여러 국가의 생활상을 순차적으로 보여줄 수 있도록 지역 배치를 우선적으로 신경 쓰는 편이에요. 그다음으로는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있는지, 그 구조가 탄탄한지를 봐요. 특히 조부모님의 연세가 아주 많아서 상대적으로 만날 기회가 적은 가족을 우선순위로 배려하기도 해요. 그다음은 디테일한 접근보다 직관적으로 와닿는 느낌을 눈여겨봐요. 예를 들어 아프리카나 북유럽처럼 지리적으로 아주 멀거나 손주를 못 본 지 5년이 넘었다는 사연을 들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다’는 직관적인 애틋함이 느껴지거든요. 마지막으로 내레이션 없이 진행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보니 출연자들의 캐릭터와 성격도 유심히 보게 돼요.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도 좋지만, 겉으론 차가워 보여도 속 깊은 손주라든가, 말투는 투박해도 손주를 위해 음식을 챙기는 경상도 할머니처럼 서로 상반된 매력이 있는 캐릭터들이 나올 때 그 선함과 애정이 카메라에 더 잘 담기더라고요.

 


한국 조부모님과 해외에 사는 손주들의 첫 만남부터 동거까지 카메라로 담아내는 생생한 제작 과정을 알려주세요.

현지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제작진과 가족들이 친해질 수 있도록 해요. 일반인은 방송 카메라와 스태프들 앞에서 얼어붙기 쉽거든요. 그래서 카메라를 들지 않고 최소 반나절은 아이들과 신나게 놀면서 간식도 같이 먹고 선물도 주죠. 예능처럼 연출된 액팅을 요구하기보다는 가족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고 제작진은 최대한 멀리서 지켜보는 방식을 취해요. 그러다 보면 아이들이 엄마 대신 친해진 제작진 삼촌에게 달려오거나 카메라 감독님에게 안기는 돌발 상황이 생기는데, 이런 모습들을 ‘리얼’이라 생각해서 편집하지 않고 살려요. 해외 촬영이라 변수가 많고 힘들 때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즐겁게 제작하고 있어요.

 

언어부터 문화, 생활 패턴이 완전히 다른 세대가 한 지붕 아래에 사는 상황을 촬영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기준이 있나요?

기존 가족의 삶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들어갔을 때 생기는 일상의 변화와 포인트를 잘 관찰하는 데에 중점을 둡니다. 일상적인 아침 식사나 등교를 할 때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시면 아이들 행동이 달라지거든요. 내성적인 아이가 갑자기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반대로 할머니와 친해지는 과정에서 수줍어하기도 하죠. 한국에서는 당차고 자신감 넘치던 할머니가 낯선 해외 환경에서 보여주는 색다른 모습들도 중요한 관찰 포인트죠. EBS의 다른 여행 프로그램들과 달리 가족 리얼리티만이 보여줄 수 있는 현지 가족들의 실제 생활 공간과 관광지의 모습을 소개하려고 해요.

 


촬영 현장에서 예상치 못한 문화 충돌로 생긴 에피소드가 있나요?

부모의 국적이 다르다 보니 아이 키우는 방식이 정말 제각각이에요. 그중 덴마크 편의 한국인 남편과 덴마크인 아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이의 교육관 문제로 부부가 꽤 진지하게 언쟁을 벌였거든요. 아이가 유치원에서 상급반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1년 더 머물게 됐는데, 한국식 사고를 하는 아빠는 ‘어떻게든 가르쳐서 제때 올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덴마크인 엄마는 ‘나도 그랬다, 아이의 속도에 맞추면 된다’는 입장이었죠. 결국 아빠가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감동적으로 마무리됐는데, 이 같은 양육 방식과 교육관의 차이를 보며 저도 배울 때가 많아요.

 

<왔다! 내 손주>를 제작하면서 놓치고 있던, 혹은 새롭게 알게 된 가족의 가치가 있나요?

아이들은 ‘가족’이라는 개념을 또렷하게 인식하기보다는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느끼는 막연한 애정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그 감정을 화면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은데, 촬영하면서 인상 깊었던 두 순간이 그 답을 대신해주더라고요. 하나는 한국의 조부모님이 눈보라로 비행기가 뜨지 않아 결국 못 오게 됐을 때, 손녀가 펑펑 울던 장면이에요. 그 표정에서 조부모님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고 사랑하는지 그대로 느껴졌죠. 또 하나는 서로 헤어질 때였어요. 아이들은 집에 손님이 오면 “언제 가?”라고 묻지만, 조부모님은 이 먼 거리를 다시 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그 온도 차에서 오는 감정이 굉장히 애틋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이런 찰나의 순간들을 보면서 결국 가족은 함께 보내는 시간의 밀도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남들에겐 그냥 흘려보낼 평범한 일주일일지 몰라도, 이렇게 간절하게 기다리고 애틋하게 헤어지는 이들에게는 일분일초가 소중하거든요.

 


해외에서 자란 손주들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 것 같나요?

일단 대부분의 아이가 본인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들이 그렇게 가르치더라고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 산다면 “너는 프랑스 사람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한국인이니까 한국 사람이기도 해”라고 알려주는 거죠. 요즘은 워낙 한식이나 K-팝처럼 유명한 것들이 많다 보니 아이들도 너무 좋아하고, ‘한국은 나의 나라고 이건 나의 문화야’라고 인식하고 있어요. 한국에 와본 적이 있는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고, 한 번도 못 와본 아이들은 동경심을 품고 있더라고요. 전반적으로 아이들이 한국에 대해 굉장히 좋게 인식하고 있고, 부모님들도 아이들의 정체성을 잘 키워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프로그램 참가 가족들에게도 변화가 있었을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후기가 있나요?

관계의 변화가 오로지 저희 프로그램 때문만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긍정적인 변화들이 있어요. 예를 들어 사위와 장모, 며느리와 시어머니처럼 평소 대화가 적었던 관계들이 촬영을 계기로 한 번이라도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거든요.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두 사람만의 상황을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촬영 덕분에 안 해본 것들을 해보며 더 가까워졌다’는 피드백을 받을 때 보람을 느끼죠. 특히 처음에는 할머니를 오랜만에 봐서 서먹해하고 말도 못 걸던 아이들이 함께 음식을 해 먹고 나들이를 가며 챙김을 받다 보면 금세 마음을 열더라고요. 마지막에 헤어질 때는 “할머니 다음에 또 와” “내가 나중에 갈게”라며 먼저 다가가기도 해요. 보름 정도 촬영하는 동안 정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작별 장면을 찍을 때는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고요. 어찌 보면 촬영을 위해 반강제적으로 만든 시간일 수도 있지만, 그 시간이 정말 소중한 추억이 됐다는 인사를 건네는 가족이 많죠. 그때마다 ‘우리가 참 좋은 역할을 하고 있구나’라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제작팀 각자의 가족관에도 변화가 생겼나요?

아무래도 부모님께 전화를 한 번이라도 더 하게 된 것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기억에 남는 사례 중 하나는 미국 편이에요. 할머니를 뵙기 위해 매년 한국을 방문하는 가족이었는데, 어린 손녀들이 레모네이드를 직접 팔아 여비를 모으더라고요.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 아이들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어요. 한국에 사는 나는 마음만 먹으면 부모님을 뵐 수 있는데,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던 건 아닌가 싶더라고요. 부모님께 더 자주 연락하고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습관처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앞으로 <왔다! 내 손주>를 통해 더 깊이 있게 조명해보고 싶은 세대 간의 모습이나 연결 방식이 있다면요?

개인적으로는 ‘헤어짐’의 과정을 좀 더 깊이 있게 담아보고 싶어요. 지금은 만남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헤어지기 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담아보는 거죠. 떠나는 시점을 기준으로 가족들의 모습을 역순으로 구성해보면 어떨까 하는 등 제작진과 함께 여러 가지 궁리를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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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오한별

Photographer 김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