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한국적인 이름으로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메종 김해김’.
한국적인 미학과 판타지로 파리를 사로잡은 디자이너
김인태가 고수하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건 바로 <모든 것은 뿌리에서 시작된다는 믿음>❗
🖤 ‘메종 김해김’이라는 브랜드명이 독특해요. ‘김해 김씨 가문’이라는 의미는 우리나라 사람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적이잖아요.
김해 김씨는 가야 문명을 이룩한 왕가의 성씨인데, 저에게는 한국 장식예술의 상징으로 느껴져요. 그 어떤 이름보다 우리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느낌이랄까요. 이러한 한국적 유산을 더 발전시키고 널리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해외에서도 2000년 전 인도 공주와 결혼해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굉장히 흥미로워하더라고요.
🖤 대학 때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어요. 어쩌다 패션 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나요?
영문과로 진학했지만, 원어민 친구들을 보면서 언어는 기본 소양일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요. 언어는 토대일 뿐 내가 정말 잘하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이죠. 그렇게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어린 시절 할머니와 함께 바느질을 하며 인형 옷을 만든 추억이 떠오르더라고요. 참 즐거웠던 그 추억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것 같아요.
🖤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앙드레 김 선생님을 찾아갔다는 에피소드도 흥미로워요.
당시에는 알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가 앙드레 김 선생님밖에 없었거든요.(웃음) 장 폴 고티에가 피에르 가르뎅에게 패션을 배운 것처럼 나도 앙드레 김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저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대신 에스모드 서울에서 공부할 것을 추천하셨어요. 그렇게 선생님을 뵌 지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저에게는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 에스모드 파리와 스튜디오 베르소에서도 공부했죠. 유학을 결심한 계기와 파리에서 공부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이 있다면요?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20년 넘게 한국에 살면서 언젠가 어디로든 훌쩍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 같아요. 스물한 살에 파리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뒤 바로 실행에 옮겼죠.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자유로움과 다양성에 매료됐어요. 처음 1년을 계획한 유학 생활이 정신을 차려보니 10년이 훌쩍 지나 있더라고요. 그 시절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마틴 마르지엘라의 2007년 S/S 컬렉션을 직접 본 거예요. 기괴하면서도 충격적인 쇼는 패션 디자이너 지망생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 충분했죠. 운 좋게 당시 서울 패션 센터의 특파원으로 쇼를 취재할 기회를 얻었고, 이는 다양한 경험과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습니다.
🖤 발렌시아가 컬렉션팀에서 활동한 이력도 눈길을 끄는데요. 발렌시아가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리고 그 경험이 지금의 김해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 궁금합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스튜디오와 아틀리에를 오가며 수많은 장인을 만났어요. 컬렉션 피스를 만드는 장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결과물보다 과정을 즐기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 처음부터 자신의 브랜드를 만들 생각은 없었다고요. 그러다 본인만의 브랜드를 전개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뭔가요?
여러 브랜드에서 일하다 보니 나만의 무언가를 만들고자 하는 욕망이 점점 커지더라고요. 결국 디자이너로서 나만의 것, 나의 정체성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브랜드를 전개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2014년부터 개인 컬렉션을 준비했어요. 그리고 2년 뒤인 2016년에 현재의 ‘김해김’을 론칭했고요.
🖤 2019년에 파리의상조합 정식 회원으로 파리 패션 위크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삼성패션디자인펀드에서도 역대 최초로 단독 수상이라는 기록을 만들어냈고요.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김해김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직접 들은 현지 반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있다면요?
파리의상조합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 때 5분 동안 브랜드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열정적으로 브랜드와 저를 홍보하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 있더라고요. 믿을 수 없을 만큼 몰입한 순간이었고, 그들도 제 얘기에 집중해주었던 거예요. 그렇게 파리의상조합 회원 자격을 얻어 파리 패션 위크에 참여하고, 첫 공식 쇼인 2020 S/S 컬렉션에 설 수 있었어요. 당시 모델이 링거를 들고 워킹하는 런웨이로 화제가 됐죠. 가벼운 에피소드를 얘기하자면, 당시 링거는 김해김이 현대 여성에게 비타민 같은 존재가 되겠다는 의미를 담은 퍼포먼스였는데, 현지에서는 질병을 패션화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죠.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김해김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에요.
🖤 김해김의 대표적인 장식은 리본, 진주, 오간자, 드레이핑 등이 있죠. 대체로 우아하고 낭만적인 요소를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심플하면서도 시적이고, 여성적이면서도 강렬함을 추구하는 김해김의 패션 디자인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요소들이에요. 2021년부터 ‘오브세션(Obsession)’이라는 미의 집착 시리즈를 전개하고 있어요. 매 시즌 하나의 요소를 선택해 새로운 실루엣과 디테일을 개발하고 있어요. 진주, 오간자, 리본, 데님 등 좋아하는 요소를 컬렉션에 접목하고, 컬렉션에서 가장 중요한 ‘유쾌함(Playful)’을 즐기려 노력하고 있죠.
🖤 김해김의 컬렉션에서 가장 한국적인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한국 전통 공예라고 생각해요. 컬렉션마다 한국적 요소를 어떻게 접목할지에 깊이 고민하죠. 아틀리에 팀은 매년 한국 전통 공예 센터에서 새로운 공예 기술을 배우고 있어요. 이렇게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탄생한 컬렉션이 전통 매듭을 활용한 2023 F/W 컬렉션 ‘링크 업(Link Up)’입니다. 이렇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한국 전통 공예를 배우고 이를 컬렉션에 접목할 예정이에요.
🖤 김해김은 해외를 기반으로 론칭한 브랜드예요. 김해김을 가장 사랑하는 나라는 어디이고, 그들이 특히 좋아하는 김해김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해외에서 론칭하긴 했지만, 현재 김해김을 가장 사랑해주는 나라는 감사하게도 한국이에요. 2023년에 청담동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고, 2024년에 삼청동에 에스파스를 열면서 더욱 실감했어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김해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세계적으로도 명품 브랜드만 추구하던 시대는 지나고 자국의 감도 높은 브랜드를 찾는 패션인이 늘어나면서 김해김이 더욱 주목받은 것 아닐까 생각해요. 커머셜하면서도 실험적인 디자인을 이어가는 모습을 좋게 봐준 것 같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한국 문화가 글로벌에서 주목받으면서 브랜드에 끼친 영향이 있나요?
‘김해김’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한국 브랜드라는 인식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사랑받는 만큼 김해김도 덩달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특히 아티스트들의 파급력을 몸소 체감하고 있어요. 김해김의 경우에도 블랙핑크 제니와 잔나비의 최정훈이 착용하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그런 의미에서 여러 셀럽들과의 컬래버레이션 작업을 해보고 싶기도 해요.
🖤 김해김의 컬렉션과 옷에는 철학과 예술, 판타지가 공존합니다. 앞으로 쇼에서 더 해보고 싶은 것들이 있나요?
쇼를 통해 김해김만의 예술적이고 실험적인 여정을 계속하고 싶어요. 예를 들어, 2023 F/W 컬렉션의 진주 해방 퍼포먼스와 2024 S/S 컬렉션의 리본 조립 퍼포먼스처럼 관람객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퍼포먼스를 꾸준히 이어나갈 계획이에요.
🖤 2016년 첫 번째 컬렉션을 치르고 8년 차에 접어들었어요. 처음 브랜드를 론칭할 때와 달라진 점이 있나요?
처음 브랜드를 론칭할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김해김 크루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을 몸소 느끼며, 팀원들과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요.
🖤 김해김의 이름으로 해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요?
아주 많아요.(웃음) 김해김의 10년 계획에는 세계 각 도시에 플래그십을 오픈하는 것뿐만 아니라 패션을 넘어 음악, 애니메이션, 연극, 공연, 전시 등 다양한 문화예술 콘텐츠를 창조하는 프로젝트들도 포함되어 있어요. 정유미 작가와 3년째 준비 중인 애니메이션도 곧 공개할 예정이에요.
🖤 김해김만의 고유한 디자인 철학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자기애를 바탕으로 외면과 내면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장식예술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 속에서 김해김이 하나의 매개체로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화가 사랑받는 만큼 김해김도 덩달아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특히 아티스트들의 파급력을 몸소 체감하고 있어요.
김해김이 매 시즌 전개하는 ‘오브세션(Obsession) 시리즈’는 디자이너가 집착하는 미의 요소를 접목한 컬렉션이다. 진주, 오간자, 리본, 데님 등 우아하고 낭만적인 요소로 가득하다.
*사진 제공 메종 김해김
Editor 오한별